할머니의 진심(眞心)
유언장에 관한 상담을 하러 온 세 사람
김복덕 할머니와 그 아들인 박00, 며느리 정00.
“평생 고생만 하셨는데, 6개월 전에 위암 선고를 받으셔서 현재 항암 투병중이십니다.”
수더분하게 보이는 아들의 얼굴에는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역력했다.
“재산분배에 관해서는 형제간에 전부 합의를 봤습니다. 그래도 확실하게 유언장을 작성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왔습니다.”
며느리가 또박또박 분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할머니는 아무런 말씀 없이 그냥 눈만 지그시 감고 있었다.
재산목록을 살펴보니 할머니 명의로 된 재산이라고 해봐야 경기도에 있는 천 평짜리 논이 전부였다.
상속대상 자녀로는 장남, 그리고 그 아래로 세 명의 딸이 있었다.
현행 민법에 따르면 장남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많은 비율의 상속분을 가져갈 수는 없고, 네 명의 자녀가 1/4씩 공평히 나눠가져야 했다.
천 평짜리 논을 자식들이 나눠 갖는데 변호사 사무실까지 와서 상담을 받는 이유는 뭘까 궁금해 하다가 며느리의 후속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그 지역 일대가 수용(收用)이 될 것이라는 뉴스가 보도되었고, 관할 지자체에 알아본 바로도 한 2년쯤 후면 보상이 이루어질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것이다. 할머니 명의 논에 배정될 보상금이 대략 20억 가량이었다.
평생 농사만 짓던 박씨로서는 엄청난 금액임이 분명하다.
나는 어떻게 유언을 하실 거냐고 물어봤더니 며느리 답은 이러했다.
“논 전체 중에서 70%를 장남이 갖고, 나머지 30%를 세 명의 딸들이 갖는 식으로 가족들이 전부 합의했습니다.”
계속 할머니는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나는 “일단 세 분의 따님들은 원칙적으로 25%의 상속분을 갖고 계신데, 유언대로 하면 따님들은 10%씩밖에는 못가지시는 건데요. 유류분이라고 해서 따님들 각자의 기본 상속분인 25%의 절반, 즉 12.5% 까지는 따님들에게도 보장이 되니까, 10%만 주기로 유언을 하시면 나중에 따님들이 유류분 몫으로 2.5%를 더 청구할 수도 있을텐데요.”라면서 유류분에 대한 설명을 드렸다.
상속인들은 자신이 법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기본 상속분의 1/2까지는 최소한 보장이 되는데, 이를 유류분(遺留分)이라고 한다. 즉, 나는 현재 며느리가 주장하는 대로 김할머니가 유언을 하면, 딸들의 유류분이 침해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한 것이다.
“어머님은 저희들이 쭉 모셨고, 앞으로도 그럴 건데, 이 경우에는 부모를 부양한 자식이 더 많은 상속분을 가져갈 수 있다면서요? 그 부분까지 감안하면 장남이 70%를 갖는 건 가능하지 않나요?”
부모를 특별히 부양하거나 부모의 재산형성에 기여한 자식들에게, 상속시에 좀 더 인정을 해주는 것을 기여분(寄與分)이라고 한다. 며느리는 바로 그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아하,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가능은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유언자의 뜻일텐데, 할머니께서 그러시다면 그렇게 유언하셔도 됩니다.”
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직접 ‘공증’하는 방법으로 유언장을 작성할 것인지 물어봤더니 그제서야 김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했다.
“변호사님, 유언장은 제가 집에 가서 조용히 쓰고 싶은데 오늘은 유언장 쓸 때 뭘 조심해야 할지만 알려주세요.”
유언장은 꼭 변호사 사무실에서 공증의 방식으로 작성할 필요는 없다. 유언자가 자필로 작성하고 서명, 날인을 하면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으로 효력이 발생한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께, 유언장 작성시에 유의해야 할 점을 설명 드리고, 집에 가서도 참고할 수 있게 ‘유언장 작성시 유의할 점’이라는 설명 자료를 출력해서 드렸다.

그로부터 10개월쯤 지났을 때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변호사님, 기억나시나요? 그 때 유언장 때문에 찾아뵈었던 김복덕씨 며느리 되는 사람입니다. 두 달 전에 시어머니는 돌아가셨구요. 그래서 남은 자식들끼리 상속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고모들은 자기들 모두에게 25%씩 달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장남에게 70% 물려준다는 유언장을 보여 줬는데도 막무가내입니다. 지난 주에 남편을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유언장이 있는데도, 그 내용과 배치되는 주장을 하면서 딸들이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나는 장남의 의뢰를 받아 상속재산분할청구소송의 피고가 된 장남의 소송대리인으로 그 사건에 관여하게 되었다.
원고인 딸들의 소송대리를 담당한 변호사는 대학 선배인 최00변호사였다. 써클 선배인 최변호사는 가족법 쪽으로 꽤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가족법 전문가인 최선배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송을 제기했지?’
궁금한 부분이었다.
상대방의 소장(訴狀 ; 원고가 자신의 청구를 주장하는 서면)에 대해 나는 답변서(피고가 원고 청구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서면)를 제출했다.
답변서의 주 내용은 ① 피상속인인 김복덕씨는 이미 유언장을 작성했고, 그에 따르면 딸들의 몫은 전체 상속재산의 10%씩, 합계 30%에 불과하다. ② 그런데도, 세 명의 딸들이 각자 25%씩 합계 75%의 상속분을 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유언의 내용과 맞지 않아 부당하다.
몇 주 뒤 제1차 변론기일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 법정 바깥에서 최변호사를 만났다. 오랜만이라고 안부 인사를 나누면서 “선배님,
이 사건은 왜 맡으셨나요? 패소가 뻔 한 사건인데.”라고 말하자 최선배가 씩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래? 그건 뭐 법정에서 가려질테고. 유언장 작성에 대해서 그 할머니에게 조변호사가 조언해 드렸다면서?”
“네, 제가 자세하게 설명해 드렸죠.”
그러자 선배는 “그래, 맞아.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했던 것 같아.”라면서 계속 아리송한 미소만 지었다.
왠지 밀려드는 불길한 느낌.
나는 재판이 시작되자 판사님에게 ‘원고의 청구는 유언과 배치된다’는 주장을 했다. 판사님은 최선배에게 ‘유언장이 있는데, 원고가 이런 소송을 제기한 이유가 뭔가요?’라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최선배는 유언장 사본을 판사에게 제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원고측이 증거로 제시한 갑 제1호증 유언장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그 유언장에는 유언자의 주소와 도장이 찍혀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유언장은 무효입니다.”
뭐라고? 주소와 도장이 없다고?
나는 급히 의뢰인으로부터 받은 유언장 사본을 펼쳐봤다.
아차차.. 그 동안 유언의 내용에만 집중해서 봤었는데, 자세히 보니 유언자의 ‘주소’ 부분과 ‘도장’이 빠져 있었다.
즉 유언장에는 ‘전체 상속재산 중 70%는 장남에게, 나머지 30%는 세 명의 딸들에게 10%씩 나눠준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고 그 밑에 ‘2010. 3. 4. 김복덕’이라고 자필로 기재가 되어 있었다.
자필증서에 의한 유언일 경우, 유언내용, 본인 서명 뿐만 아니라 주소, 그리고 도장날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주소와 도장날인이 빠져 있는 유언장은 유효한 유언장이 아니며, 이 경우에는 유언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민법상 상속의 원칙으로 돌아가 장남과 세 딸들은 25%씩 공평하게 상속 받게 된다.
나는 너무도 당황이 되어 판사님에게 ‘다음 기일까지 피고의 입장을 밝히겠다’라고 설명하고 법정을 빠져 나왔다.
그 날 바로 장남과 며느리를 불러 상황 파악을 했다. 내용인 즉 이랬다.
나에게 상담을 받고서 1주일 쯤 뒤에 할머니는 장남과 며느리 앞에서 유언장을 썼고, 며느리는 그 유언장을 은행 금고에 보관해 왔었다. 물론 장남과 며느리는 할머니의 유언장 내용, 즉 전체 상속재산의 70%를 장남에게 준다는 부분을 꼼꼼히 검토하고 확인했다. 그런데 유언장에 할머니의 주소와 도장이 빠진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유언장을 쓸 때 잘 누락하는 부분이 ‘주소’, ‘도장’이라는 사실을 할머니께 강조했고, 별도로 ‘유언서 작성시 유의할 점’이라는 안내문까지 드렸는데 할머니는 마지막에 그것을 실수하셨던 것 같다.
“변호사님, 이건 너무 불합리합니다. 분명 그 때 시어머님이 변호사님 앞에서 전체 재산의 70%는 남편에게 준다고 했잖아요? 그럼 변호사님이 증인이 되어 시어머님의 뜻이 그러했다고 말해 주시면 안 되나요? 유언이라는 게 그 분의 ‘진짜 뜻’이 중요한 것이지 유언장의 형식 때문에 ‘진짜 뜻’이 인정되지 않으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잖아요?”
물론 며느리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우리 민법은 ‘유언’의 형식상 요건을 아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주소와 도장, 두 개가 빠진 유언장은 법원에서 인정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1심 재판을 진행하면서 나는 다양한 논리를 내세우면서 유언장에 다소 형식상 흠결은 있지만 할머니의 ‘진정한 뜻’, 즉 진심은 상속재산의 70%를 장남에게 물려주려는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5개월 후 1심 재판 선고. 당연히 장남의 패소.
의뢰인은 항소(1심 판결에 불복하면서 2심 법원에 이의제기를 하는 것)하자고 했지만, 나는 거의 가망 없다는 점을 설명했고, 결국 그 사건은 그렇게 종결되었다.
할머니의 사소한 실수가 이토록 형제들 간의 소송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했다는 생각에 영 마음이 씁쓸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법조인 모임에서 최선배를 만났다.
“최선배 축하합니다. 하지만 전 속이 쓰립니다. 아시죠? 오늘 술 한 잔 사세요. 할머니가 그 실수만 안했어도...”
그러자 최선배가 내 어깨를 툭쳤다.
“술 한 잔 사지. 당연히 사야지, 신세를 졌는데.”
신세를 지다니? 이건 또 무슨 말?
“조변호사, 아직도 그 할머니가 실수한 거라고 생각해? 내가 볼 때 그 할머니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야.”
선배의 이어지는 설명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할머니가 마지막 암 투병을 하고 있을 무렵, 병문안을 왔던 큰 딸에게 할머니는 내가 작성해서 줬던 ‘유언서 작성시 유의할 점’이라는 안내장을 몰래 쥐어주면서, 나중에 당신이 세상을 떠나거든 꼭 변호사를 찾아가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그럼 할머니는 고의로 유언장에 하자를 남겨 두었다는?
“며느리가 너무 욕심을 냈고, 여리기만 한 아들도 뭐라고 항변을 못했던 거지. 그런데 조변호사 설명을 잘 듣고 할머니가 기발한 해결책을 마련해 두신 거야.”
뒤통수를 맞은 느낌.
“조변호사, 너무 억울해 하지 마. 할머니의 진짜 뜻이 중요하다고 재판 때 계속 그랬지? 4남매에게 공평하게 재산을 나눠주고 싶었던 게 할머니의 ‘진짜 뜻’이었어. 조변호사가 아주 잘 코치해 드린 덕에 할머니의 뜻대로 재산분배가 이뤄졌어. 자, 가자. 오늘 한 잔 찐하게 마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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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5&aid=0000048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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