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1.24 20:34


분야 : Book & Insight

제목 :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정확한 의미는?

 

대상서적 : "철학 vs 철학" (강신중 저)

 
<인용문>

 

(1) 『방법서설(Discours de la methode)』에서 데카르트는 어떤 회의주의자도 부정할 수 없는 제1명제를 밝혔던 적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이다.

 

(2) “나는 내가 사유하는 동안만 존재하고, 사유를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을 멈춘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데카르트가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육체를 포함하는 나의 실존은 아니었던 셈이다.

 

(3) 그가 여기서 ‘존재’한다고 했던 것은 ‘순수한 생각’, 혹은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정신, 영혼, 지성 혹은 이성”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국 그가 말한 ‘존재’란 ‘육체’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던 셈이다.

 

(4) 이 점에서 데카르트의 유명한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 나온다. 그에게 육체는 순수한 생각, 혹은 이성의 잉여지대에 있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5) 데카르트가 말한 이성은 무엇인가를 의심할 때에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의심할 때만큼 인간의 생각이 왕성하게 작동하는 경우도 없을테니 말이다.

 

(6) 사실 의심만큼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증해 주는 것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의심한다는 것은 참이라고 통용되는 진리에 다시 ‘근거’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심한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참이라고 믿고 있던 것이 진정으로 참일 수 있는지 근거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7) 이 점에서 이성(reason)이란 말이 가진 함의는 매우 시사적이다. reason이란 단어는 인간이 가진 추리능력 뿐만 아니라 ‘이유’나 ‘근거; 혹은 ’이유대기‘의 능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8) 이로 인해 이성은 ‘이유를 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나의 생각>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가 갖는 철학사적 의미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내가 사유하는 동안만 내가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

 

내가 사유, 혹은 의심하고 있지 않으면

내 육신은 살아 있으나 내 존재는 ‘없는 것’과 같다는 데카르트의 저 말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우리가 흔히 듣는 자기계발서의 철학적 근거가 되는 말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가 말하는 인간의 이성이 갖는 속성으로서의 ‘생각’이,

단순한 ‘사념’이 아니라, 이성적인 ‘의심’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아무런 의심 없이,

아무런 고민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영혼은

 살아 있으되 죽은 것과 다름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저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진정한 가르침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Posted by ETHOS 조우성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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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성의 전당 2019.02.05 21: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는 지성의 전당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존재한다 글이 있어서 댓글을 남겨 보았습니다.
    제가 또 댓글을 달았다면 죄송합니다.
    인문학 도서인데,
    저자 진경님의 '불멸의 자각' 책을 추천해드리려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잘 나와 있습니다.
    책 내용 중 일부를 아래 글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더 많은 내용이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정보를 드리는 것뿐이니
    이 글이 불편하시다면 지우거나 무시하셔도 됩니다.
    ---

    인식할 수가 있는 ‘태어난 존재’에 대한 구성요소에는, 물질 육체와 그 육체를 생동감 있게 유지시키는 생명력과 이를 도구화해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의식과 정신으로 나눠 볼 수가 있을 겁니다.

    ‘태어난 존재’ 즉 물질 육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 역할을 다한 도구처럼 분해되고 소멸되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육체를 유지시키던 생명력은 마치 외부 대기에 섞이듯이 근본 생명에 합일 과정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육체와의 동일시와 비동일시 사이의 연결고리인 ‘의식’ 또한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보충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단절작용을 ‘죽음’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각하고 지각하는 존재의 일부로서, 물질적인 부분은 결단코 동일한 육체로 환생할 수가 없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의식’ 또한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정신은 모든 물질을 이루는 근간이자 전제조건으로서, 물질로서의 근본적 정체성, 즉 나타나고 사라짐의 작용에 의한 영향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타날 수도 없고, 사라질 수도 없으며, 태어날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는 불멸성으로서, 모든 환생의 영역 너머에 있으므로 어떠한 환생의 영향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에 대한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자 실체로서, ‘있는 그대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체에 의한 작용과정으로써 모든 창조와 소멸이 일어나는데,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다는 것입니까?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환생을 하고 누가 동일한 의식으로 윤회를 합니까?

    정신은 물질을 이루는 근간으로서의 의식조차 너머의 ‘본체’라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회의 영역 내에 있는 원인과 결과, 카르마, 운명이라는 개념 즉 모든 작용을 ‘본체’로부터 발현되고 비추어진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태어난 ‘한 사람’, 즉 육신과의 동일성으로 비추어진 ‘지금의 나’로 여기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은 스스로 자율의지를 갖고서,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태어나고 늙어지고 병들어지고 고통 받고 죽어지는, 모든 일련의 과정을 들여다보면 어느 것 하나 스스로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책임을 외면하기 위해 카르마라는 거짓된 원인과 결과를 받아들이며, 더 나아가 거짓된 환생을 받아들이며,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거짓된 속박, 즉 번뇌와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환영 속의 해탈을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거짓된 자기견해 속의 환생과 윤회는, 꿈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더불어서 ‘누구이며 무엇이다’라는 정의를 내리려면 반드시 비교 대상이 남아 있어야 하며, 대상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그 어떠한 자율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는 꿈속의 꿈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뚜렷하고 명백하다 할지라도 ‘나뉨과 분리’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나’에 대한 그릇되고 거짓된 견해만을 바로잡았을 뿐입니다.

    https://blog.naver.com/ecenter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