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13. 07:46

'내 이야기를 들어 줄 단 한사람이 있다면-프롤로그(수정) - '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아직 형사판결 선고가 나려면 20분이나 남았다. 6개월간의 법정공방. 나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침대에 쓰러져 판결을 기다렸다.

드드드... 휴대폰이 내 손에서 요동쳤다. 발신자 표시를 보니 P. 나는 심호흡을 했다.


“변호사님,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


P는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무죄라... 얼마나 간절하게 기다렸나. 가슴 끓어오르는 감동을 느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천만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친구의 부탁으로 몇 차례 거절 뒤에 어쩔 수 없이 맡게 된 그 동생 P의 미성년자 강제추행사건. 대형로펌에 소속된 내가 이 사건을 수행한다고 하자 주위에서는 왜 그런 사건을 맡느냐고 다들 한 마디씩 했다. 내가 이 사건을 맡기로 결정한 것은 P와 직접 대면하고 나서였다. 그를 처음 만난 날, P는 분노와 외로움에 빠진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비장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주위 사람 모두 제 말을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족도 반신반의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변호사님, 전 절대 그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제 눈을 보고 다시 한 번 말해 보게. 정말 맹세코 그 일을 하지 않았나?”

P는 찬찬히 나를 쳐다보았다. 

“전 결코 그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님이 믿어 주시든 아니든... 전 결백합니다. 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전 차라리 자살을 해서라도 결백을 밝힐 겁니다.”

나는 P의 눈빛에서 차마 저항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꼈고 그 사건을 맡았다.


‘어차피 뻔한 사건인데 이런 파렴치범을 변호하다니...’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듯한 재판부를 상대로 한 재판 진행은 처음부터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나는 재판부에게 ‘제발 현장검증을 해 달라’고 수차례 요청했다. 실제 현장에서 사건을 재연해 본다면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할 자신이 있었다. 재판부의 계속된 거절에도 집요하게 매달려 현장검증을 이끌어 냈고, 그것이 사건의 분수령이 됐다.


17년간의 변호사 업무 과정에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결코 재기하지 힘들 것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내 용기를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선 사람, 세속적인 성공의 절정에서 급전직하로 추락해 철저히 부서진 사람, 남의 신뢰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만 챙기다가 더 큰 배신의 아픔을 당한 사람, 위선의 가면을 쓰고 거짓인생을 살다가 결국에는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스스로 혼란스러워 한 사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내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포기한 사람. 


소송을 통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검찰에 의해 기소가 되어 형사피고인이 되었든, 아니면 재산 다툼 때문에 민사소송의 원고와 피고가 되었든, 그들의 가슴 속에는 분노와 원망으로 인해 퇴적층처럼 켜켜이 쌓인 커다란 상처가 있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나서야 하는 사람이 변호사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 상처를 도려내겠다고 ‘법’이라는 매스를 들고 의욕적으로 달려들면 과연 그 상처가 치유될까? 나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변호사로서의 경험이 쌓여가면서 더 본질적인 무언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죄선고 후 P의 가족들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사실 저희들 마음 한 구석에 '진짜 이 녀석은 무죄일까? 진짜 이 녀석은 결백할까?‘라는 의심이 계속 들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가족이면서도 이런 의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고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변호사님은 이 녀석의 말을 들어주시고 믿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만약 나마저 P의 이야기를 흔한 변명으로만 여기고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자신의 말대로 소송 중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까?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격한 인생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는 이들이 감정의 극점(極點)에 외롭게 서 있을 때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단 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에 의해 의뢰인은 삶의 용기를 얻고 진정한 자기치유(自己治癒)를 시작하게 된다. 


내가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감정이 오고가는 법정의 한복판에서 17년간 목도한 인생의 진실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나는 논리를 앞세우는 변호사가 아니라 의뢰인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열린 마음으로 오랫동안 들어줄 수 있는 변호사가 되려고 노력했다. 물론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뚜벅이 변호사’라는 별명(필명)을 사용하고 있다. 힘들고 지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나의 지향점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 그래서 ‘뚜벅이 변호사’는 내 별명(필명)임과 동시에 내 삶에 중심을 잡게 하는 중요한 인생모토이기도 하다. 


인생길에는 크고 작은 고비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는 그 고비로 인해 힘을 잃고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가장 극단적인 인생의 고비라고 할 수 있는 소송과정에서도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가능할 수 있다는 지혜 한 자락, 그리고 그로 인해 팍팍해진 무릎을 두드리고 다시 먼 길을 떠날 수 있는 용기 한 줌을 전할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변호사법에 따르면 변호사는 그 직무상 알게 된 비밀을 누설할 수 없다. 굳이 이러한 변호사법 규정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의뢰인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미주알 고주알 세상에 알리는 일은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이 책을 쓰면서 의뢰인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것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나의 가정사, 그리고 의뢰인들로부터 직접 승낙을 얻은 십여 개의 에피소드를 제외한 나머지 에피소드는 내가 다루었던 사건에서 기본적인 모티브만 따오고 상당 부분 각색을 하거나 몇 개의 스토리를 합쳐서 이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한 결과물이다. 아울러 등장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직업도 편의상 설정한 것일 뿐 실제사례와는 다르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이 책의 출간을 통해 매일 밤늦게 퇴근하는 아들을 보면서 걱정하시던 부모님, 주말에도 제대로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아내와 두 딸 혜리와 세영에게, 당신의 아들이 그리고 당신의 남편이자 아빠가 어떤 고민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담담하게 보여 드림으로써 그 동안의 소홀함에 어느 정도 면죄부를 받고자 하는 얄팍한 마음을 담아 본다.


2013. 3.  조 우 성




Posted by ETHOS 조우성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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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發墨 2013.03.15 01: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책은 언제쯤 출간될 예정인가요?

  2. ETHOS 조우성변호사 2013.03.15 01:4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3월 27~28일 사이에 인터넷 서점에 입고된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